본문
빨강 콤플렉스와 입자화된 생명의 양태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1. 김유성의 대학원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삶의 여행은 빨강을 간직한 여행이다>(2010)의 마지막 부분을 그리고 있었다. 질서와 균형의 바로크풍과 급격한 원근법에 의해 위엄을 풍기는 건축물은 견고하게 구조화된, 벗어나기 어려운 어떤 질서나 체계의 메타포로 보였다. 이후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나는 그것을 파일형태로 확인했다-, 건축물의 후면부에는 두 명의 여인이 추가되어 있었다. 화면의 좌측 중앙부에선 빨강색 원피스를 걸친, 반 쯤 기둥 뒤에 가려진 한 여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나머지 한 명의 여인은 건축물의 오른쪽 상단부분의 다소 어색하게 위치된 듯한 난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나체 상태며, 빨간 커튼이 반쯤 젖혀져 있는 실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 둘은 각각 김유성 자신이거나 분신임이 분명해 보인다.
거대한데다가 무채색의 모노크롬으로 처리된 칙칙하고 음산한 건축물에 의해 그녀들은 더더욱 작아 보인다. 기둥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거나 반쯤 젖혀진 빨간 커튼으로 볼 때, 아마도 (감금상태까지는 아닐지라도)그들의 자유가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 상황이 무엇이건, 아마도 그들이, 즉 김유성이 쉽게 그곳에서 빠져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그가 완성 중이었던 또 하나의 작품 제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작품의 제목은 <빨강에서 걸어 나올 수 없는 자, 그는 늘 불안하다>(2010)였다.
그럼에도 이 거대한 체계와 왜소한 인간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세계에서 정작 긴밀하게 이 서사공간의 뉘앙스를 조절하는 것은 원근법적 질서와 무관하게 추상적으로-평면적으로- 그려진 빨강색의 작은 원들이다. 그것들이 무엇인가는 분명치 않다. 때론 차가운 벽에서 스멀스멀 배어나와 예기치 않은 얼룩으로 남는다. 이로 인해 위엄에 차있는 체계가 흐트러지고 질서는 교란된다. 이 혼돈과 파토스의 개입은 모노크롬의 균제된 구조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파장을 야기시킨다. 공중에 점점이 부유하거나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그것들은 그런 식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조현어법으로도 표현이 불가할 것 같은 생명의 입자들처럼 보인다. 게다가 조금씩 흘러내리는 듯한 액상의 그것들로부터 이내 혈액을 연상시키는 것은 김유성의 회화세계 전체로 볼 때 하등 무리한 추론이 아니다. 그의 세계는 자주 이 부단한 점액질의 것에 의해 서사적 고유성을 확보한다.
김유성 자신은 그것들의 저변을 ‘빨강의 콤플렉스’로 정의하는데, 그 의미는 사뭇 복합적이다. 그것은 생명의 상징적 도상학의 일환일 수도 있고, 욕망의 추상화된 아바타일 수도 있으며, 여성성의 미니멀한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그것은 흐르고, 부유하고, 스스로 파열됨으로써, 경직되고 정착되어 있으며, 보다 형태보존적인 남성성의 계보와 대립각을 이룬다. 그만큼 그것들은 때론 자극적이고 때론 순결해 보이는 넓은 스팩트럼을 지닌 채, 김유성의 회화공간에서 변함없는 의미의 출처로 작용하고 있다.
이 원색의 조형기제에 의해 김유성의 세계를 관류하는 하나의 서사가 완성에 가까워 간다. 강렬한 생(生)의 동기들, 하지만 부드러운 역동성이 존재하는 모든 요인들을 하나의 관계성 안에 놓이도록 매개한다. 공간과 주체, 인물과 배경, 인간과 인형, 공간과 기억은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로 존재하고 유지된다. 여기서 공간과 구성은 마음의 일환이고 존재 내면의 연장이다. 공간으로 확장된다. 회화는 2차원과 3차원의 구획을 둘러싼 지루하고 공허한 논쟁과는 하등 무관하다.
2. 김유성의 회화에서 공간은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많은 경우 보이는 공간들은 보이지 않는 다른 공간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밀폐된 듯 보이는 경우에도, 공간은 스스로 밀폐되지 않기 위한 은밀한 기제들을 내부에 지니고 있다. 하나의 공간은 계단이나 창문, 거울 등을 통해 부단히 서사 밖의 공간으로 매개된다. <슬픈 꿈의 대화>(2010)를 보라. 창문에 덧문까지 꼭꼭 잠겨있지만, 이번에는 거울이 외부로 향하는 가능성의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 분리, 차단, 소외, 답답함과의 눈에 띠지 않는 싸움이 치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안녕.. 나의 작은 소녀여>(2009)는 그 중에서도 백미(白米)로 여겨질만 하다. 여기서 ‘작은 소녀’는 결코 승자나 패자가 아니다. 그는 군림하지도 속박당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공간의 일환으로서 공간과 함께 존재한다. 소녀는 소파 뿐 아니라, 거울과 커튼과 바닥과도 별개가 아니다. 사물들은 서로에게 끌리고 마음을 연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더 이상 물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존재는 정확하게 그에 부응하는 만큼 존중된다. 어떤 건축물도 인간을 완전히 감금할 만큼 견고하지는 못하다. 경직된 벽들에는 금이 가고, 완고하게 뭉쳐 있던 것들은 흘러내린다. 이도 저도 아닐 때는 바닥이 울렁거린다. 벽은 때때로 구조적 위험을 무릅쓰면서 수직의 질서로부터 이탈한다. 그리고 대기는 붉은 색의 액상들, 파토스적인 얼룩들, 급작스러운 파열에 의해 운명적으로 침해된다. 이렇듯, 준엄하게 구조화된 잿빛의 체계는 예기치 않은 자유의 저항에 직면한다.
이 세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을 떠올릴 때, 김유성의 세계가 의미화되는 지점이 새삼 명료해 진다. 적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김유성의 회화가 목적 없는 세련미, 덧없이 시류를 따르는 스타일들, 거창한 주석들에 둘러싸인 사념들, 온갖 조형적 허세, 작위적인 장식미, 염세적인 우스꽝스러움 등과 거리를 취하려는 성실한 태도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과 같은 시각정보의 홍수 속에서 한 점의 회화가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시혜는 무엇인가? 예술은 한 시대의 결핍을 끌어안는 것으로부터만 가능한 내적 싸움, 그리고 한 인간의 삶으로부터만 도출되는 방법론에 의해서만 지지되는 지성(知性)이다. 예술이 자주 성공의 자축연보다 쓰디 쓴 실패의 경험과 더 잘 어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억압과 유폐의 경험, 소외, 상실감이야말로 존재의 한계에 대한 정직하고 존엄한 고백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삶에 관한 정직한 고백에 목말라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의 좌표를 조정하고 재조정하는데 있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서구의 몰락』의 저자 자크 엘륄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차라리 아름다운 싯구처럼 마음을 울린다.
“나는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인간일 뿐이며 사랑에 대한 일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도전을 모두 극복하지도 못했다”
김유성의 회화는 정확하게 김유성의 삶과 콤플렉스, 열망과 상실, 속박과 저항에서 연원된다. 그곳에는 자신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섬세한 관찰과 정직한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이제 막 삶의 거센 물결 속에서 미(美)의 항로를 찾아나가는 신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요긴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김유성이 종국에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하는 잔잔한 바다에 하나의 심오한 물결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 때로는 위험한 독선의 그림자가 자기 곁에 오래 머물지라도 그 과정을 무사히 견뎌낼 수 있다면 나중에는 뿌리가 깊어진 자기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톨스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