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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서질 시간의 기억 -

 

주성열(예술철학 / 세종대 겸임)

 

 

들어서며: 비밀의 정원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Peter Handke

 

김유성 작품을 일견 마주하면 붉은 장미향이 느껴진다. 비밀의 정원에서 자란 부드러운 과육의 향기도 난다. 기분이 좋아지는 향기를 맡을 거라는 확신으로 그림 앞에 다가서는 순간 그 향기는 금방 사라진다. 붉은 빛의 온화함 뒤에는 잿빛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는 슬픔의 시간 혹은 작가의 억압된 감정이 비춰진다. 응집되지 못해 생명을 잃은 혈액이 상처를 비집고 나와 공간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외로움이나 공허함은 올빼미나 새장 그리고 널브러진 거울에서도 묻어난다. 작가는 감상자가 향기를 흡입하고 탐닉하도록 두지 않고 그림이 촉발하는 섬뜩한 불안한 세계로 이끈다. 향기에 취했다가 눈을 뜨면 언캐니(uncanny)한 그림은 비로소 헤아릴 수 없는 너무 깊거나 먼 출구를 제시한다.

 

김유성에게 떠오르는 것이 그림이 되었다하더라도 이를 만드는 것은 막연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의미보다는 작품 그대로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싶지만 작가가 은밀히 담았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으로 다시 집중하게 된다. 그림은 육체가 감당할 수 없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현실을 파고든다고 말하는 듯하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어두운 과거를 떠오르게 하고, 기억을 촉진시켜 어둠의 공간을 정화의 장소인 붉은 빛으로 공간의 질을 바꾼다. 어두운 과거가 잿빛이나 냉기가 흐르는 푸른빛이라면 미래는 장밋빛이 아니던가.

 

1. 침묵의 방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보입니다. 질서와 형상을 갖추지 못한 허깨비들은 부디 마법을 걸어 자기들을 풀어달라고 나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만

자신의 그림이 공간을 통한 심리적 사유라고 말하는 작가는 무의식의 세계를 환기하는 매개로 사적인 침대를 활용한다. 휴식을 수면이라 생각하는 그의 침실은 불현듯 사건을 저장했던 장소가 된다. 그리고 공허하거나 후미진 자리도 어제는 주목받았을 특별한 공간으로 확장되어 기억을 지우거나 탈피해 주기도 한다.

현실은 꿈의 감옥 이며 꿈은 해방의 도구이자 자유가 자리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삶이 의미 없을 때는 꿈도 결코 해방이 아니다. 부조리한 화면의 구성은 막 깨어난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느끼는 현실과 꿈이 화해 없는 대립, 갈등으로부터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꿈과 현실의 카오스와 같은 부조리한 이미지들은 깨어 있는 상태의 인간을 새롭게 바라보는 법과 새로운 구조를 발견하는 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꿈이 이 세계에 대한 표현이라면 작가에게 그림은 사고의 자유가 가능한 꿈의 언어다. 순결한 공간에 대한 꿈의 사유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저 먼 곳까지 열어준다. 오직 자신에게만 내재하는 풍부하고 자유로운 영역에서 주체를 해방시켜 텅 빈 시간으로 보내는 출구이다.

 

2. 부서진 시간

 

사실 모든 예술작품은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삶과 사물을, 그러나 누구도 객관적 주관적 시간이라는 장막을 통해야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사물을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다. 예술은 이 시간의 장막을 찢는다.” 쇼펜하우어

 

방이라지만, 심연의 끝이 보이지 않는 현기증을 일으키는 공간 속에 다양한 사물이 흩어져 있다. 김유성의 그림은 과거로부터 건져 올린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공간을 이동하면서 기억의 사물이 만드는 중세 초기의 메니푸스적인 풍자로 가득하다. 이는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세상의 구체적인 고통들, 잃어버린 말들을 말하고 새기는 작가만의 조형언어이다. 또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환상을 그리워하며 살기보다는 현실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최초의 기억처럼 열리는 또 다른 현실을 보기 위함이다. ,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그리는 데페이즈망의 공간은 그 인식으로 잃어버린 삶을 기억해 내기 위한 수단이자 매개인 것이다.

 

기억은 허술하고 쉽게 왜곡된다. 회상은 본질적으로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뇌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재구성이어서 작가는 꿈의 시나리오 쓰기가 꿈꾸는 것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꿈이 가치가 있는 것은 시나리오의 내용이 아니라 거대한 상징체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제작된 꿈은 꿈이라기보다는 꿈에 진입도 못한 채 고무풍선처럼 떠돌고 있는 부유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사라지든 표면으로 떠올라 증발하든 모든 무정한 사물들은 충분한 존재는 아니지만 항상 무엇이 되려한다. 김유성은 이를 신비의 세계가 아닌 현실의 외양 속에 감춰진 보다 진정한 현실의 세계로 이해하고 있다.

 

나가며: 슬픈 거짓말

 

타인은 지옥이다.’ 사르트르

 

무관심은 서로가 아프다. 거짓과 위선으로 무관심의 아픔을 슬그머니 덮고 있을 뿐이다. 타인을 향해 가는 길은 늘 어둡고 불확실해서 두리번거리게 된다. 어떻게 살아도 삶이 죄가 되는 세상이 있었다. 유교적 규율이든 관습이든 자유롭지 못한 세상은 온통 악으로 넘쳐났다. 살아온 날이 만든 기억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순간이 김유성에겐 그 무엇에 대한 진실과 대면하고 자유를 얻는 순간이다. 나만이 알고 묻어 두었던 지난 시절 이야기를 그림으로 대신 말 한다. 기억을 다시 발견하고 새기는 일은 봉인을 풀고 미래 시간에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삶의 언저리를 물고 늘어지는 기억의 편린들이 적대적인 현실 앞에서 순결해지기를 갈망한다.

 

이제 그림 밖으로 나오니 새장의 문은 열리고 올빼미도 감시의 눈초리를 해제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붉은 색조로 용해시키는 잠복된 최초의 꿈틀거림 같은 타나토스는 에로스의 육체적 감각으로 복귀한다. 카뮈의 두 개의 영혼 중 하나는 숨 막히는 열기를 호흡하며 밤새 위대한 소설을 사막에 세우는 것이며, 또 하나는 차가운 바다에 몸을 담그고 난 뒤 따뜻하게 달궈진 모래 위에서 기분 좋은 태양 빛을 만끽하는 것이다. 작가 김유성의 슬픈 거짓말이 사막에서 나왔다면, 그의 그림은 바다에서 나온다. 사막 속에서 자신의 목마름을 기만하지 않았던 그의 그림은 향기를 뿜어내고, 바람결에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감상자는 향과 색과 소리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분별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을 형성하는 퍼즐과도 같은 그림 속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다 자리를 뜬다. 작가는 꿈이 꿈을 붙잡고 꿈과 꿈이 서로 반복되고 겹쳐지지만 결코 합쳐지지 않음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둠을 가로지르며 확산된 비애 속에서 자라난 기억들은 추억이라 부르기 어렵다. 다만, 이 모든 것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서 은폐된 결핍이나 잠재된 죽음만이 아니길 바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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