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자 인더하우스] 은은하게 우아하게 요리도 디자인처럼…패션 디자이너 박민지씨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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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5-06-09 22:21본문
매 시즌 ‘유행 패션’이 거리를 채우고, 신상품을 내놓기 무섭게 불티나게 팔린 시절이 있었다. 당시 여성들이 선망하는 브랜드의 디자이너였던 박민지씨는 가장 치열한 패션 최전선에서 매주 새 옷을 만들어 매장 매니저, 브랜드 MD, 임원 등의 품평을 받는 ‘컨벤션’을 치렀다. 쉽게 말해 샘플 의상의 데뷔 오디션이다. “소매 볼륨이 어색해요” “저 컬러가 싫어요”… 탈락률에 따라 인사고과가 매겨지는 냉혹한 심사를 십수 년간 견뎌냈다.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로 목덜미가 뻣뻣해지는데, 그는 “제 브랜드 론칭을 해보니 그때의 긴장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내 자식 같은 브랜드의 존폐 부담감에 휘둘릴 때도, 박씨는 주말마다 요리를 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가장 사적인 공간이자, 작업 중간중간 생각을 정리하고 흐름을 다잡는 데 큰 역할을 해준 곳”이라고 소개한 그의 부엌을 찾았다. 현관문을 연 집주인은 서둘러 에스프레소를 내려 아이스커피를 만들고 미리 만들어둔 바나나 타르트와 아이스크림을 내왔다. 녹진한 타르트, 발사믹 식초와 간수를 잘 뺀 신안 천일염을 뿌린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맛이었다. 기대에 찬 호스트에게 기꺼이 꾸밈없는 리액션을 보여주는 기쁨,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초대받은 자의 감각이었다.
박민지씨의 주특기는 프렌치 요리다. 달걀찜도 생크림과 냉장고 속 채소를 활용해 이국적인 멋을 더한다. 프랑스 유학 시절 어려서 어머니를 돕던 기억을 되살려 친구들에게 밥을 해주며 요리에 눈을 떴다. 스타 셰프 조엘 로브숑의 요리 프로그램을 ‘밥 친구’ 삼고, 친구의 어머니와 이웃집 할머니의 솜씨를 배우기도 했다. 귀국 후 디자이너가 된 뒤에는 파리 출장이 잡힐 때마다 학생 시절에 눈여겨봐 둔 현지 레스토랑을 찾으며 미식 경험을 쌓았다.
박씨는 평소 그의 음식을 즐겨 먹던 지인들의 추천으로 2022년 요리 유튜브 채널 르쁠라(Leplat)를 개설했다. 독학으로 편집을 익혀 일주일에 한 편 정도 올리기 시작했는데, 벌써 400편에 가까운 기록이 쌓였다. “오늘도 맛있고 멋있게 보내세요”라는 채널 소개에는 패션 디자이너와 요리 크리에이터의 정체성이 고루 담겼다. 직접 찍은 사진과 레시피를 담은 책 <집으로 초대>도 발간했다.
“예술작품처럼 예쁘다”는 댓글이 달리지만, 만드는 법의 순서는 보통 5~6번, 아무리 복잡해도 10번을 넘지 않아 위화감이 적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담음새, 플레이팅이다. 그중에서도 동그릇은 그의 시그니처라 할 만하다. 부엌에 들어서면서부터 오후의 햇빛을 받아 은은한 구릿빛을 발산하는 그릇장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릇에 ‘잘생겼다’는 표현을 쓰고 싶을 정도로 우아하고 늠름하다.
박씨는 “어려서는 예쁘다고 생각만 하다가 직장인이 된 뒤 출장길에 사거나, 직구로 모은 것들”이라고 했다. 구리 컬렉션은 냄비나 팬부터 빵 바구니, 타르트 틀, 뒤집개, 화로 등 주방 기구 대부분을 망라한다.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아예 단골 가게도 있다. 가장 비싼 파스타 솥은 직구로 140만원에 샀는데, 한국에서는 200만원이 넘는단다. 나날이 오르는 구리 시세를 생각하면 짐작 가능한 가격이다.
솜씨 좋은 요리사의 집에서 그릇은 가격보다 쓰임새가 우선이다. 손바닥 크기의 양수 냄비는 오븐에도 넣을 수 있고, 그대로 1인용 그릇으로 식탁에 올려도 근사하다. 물고기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생선 찜기는 연한 살이 부서지지 않도록 들어 올릴 수 있는 채반도 갖췄다. 전 세계를 뒤져 스웨덴 옥션에서 구한 애장품이다. 동그릇 특유의 얼룩이 세월의 흔적처럼 남는데 그 또한 매력이다. 틈틈이 전용 세제를 이용해서 닦아 둔다. 유일한 단점인 육중함을 기꺼이 감수할 만하다.
그릇장만큼이나 궁금한 건 디자이너의 옷장이었다. 눈치 빠른 박씨가 먼저 드레스룸 문을 열어줬다. “디자이너 옷방치고는 시시하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게 언니와 함께 쓰는 옷방치고도 단출했다. 가방과 신발 상자 등을 넣어둔 수납장과 의류 매장에서 볼 법한 이동식 행거 네댓 개가 있었다. 시스템 옷장보다 더많이 들어가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디자인실’에서 얻은 노하우라고 했다.
경영이나 투자 분야에서 자주 쓰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개념은 그리 로맨틱한 용어가 아니다. 박씨의 집은 선택과 집중의 홈 버전으로, 공간에 평온함이 흐른다. 인터뷰를 위해 살림살이를 죄다 지하창고에 잠시 넣어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물론 평범한 구조의 아파트다!)로 그릇장이나 드레스룸 모두 딱 필요한 것으로만 정갈하게 채워져 있다.
디자이너 초년 시절에는 예쁜 옷을 만드는 것만이 제일 중요한 줄 알았다. 그러나 책임자의 자리에 올라 보니 마케팅부터 백화점 매장의 위치를 비롯해 고객 명단에 이르기까지 신경 써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옷보다 숫자가 먼저 그려질 때는 디자이너로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이토록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지만, 패션 업계는 수년 전 활황기처럼 몇 배수의 제품을 미리 생산해 쌓아놓고 팔던 공식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박씨는 소모적인 패션 산업의 현주소를 돌아보고 기존 방식과는 다른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본업에 무게를 실어 3년 전 <패션 디자이너, 미래가 찬란한 너에게>를 내놓은 데 이어 최근 <세계 유명 패션 디자이너 50인>을 출간하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그가 커리어의 선택과 집중의 기로를 지나 어떤 새로운 작품으로 또 다른 ‘플레이팅’을 완성할지 숨죽여 기다려볼 참이다.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로 목덜미가 뻣뻣해지는데, 그는 “제 브랜드 론칭을 해보니 그때의 긴장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내 자식 같은 브랜드의 존폐 부담감에 휘둘릴 때도, 박씨는 주말마다 요리를 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가장 사적인 공간이자, 작업 중간중간 생각을 정리하고 흐름을 다잡는 데 큰 역할을 해준 곳”이라고 소개한 그의 부엌을 찾았다. 현관문을 연 집주인은 서둘러 에스프레소를 내려 아이스커피를 만들고 미리 만들어둔 바나나 타르트와 아이스크림을 내왔다. 녹진한 타르트, 발사믹 식초와 간수를 잘 뺀 신안 천일염을 뿌린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맛이었다. 기대에 찬 호스트에게 기꺼이 꾸밈없는 리액션을 보여주는 기쁨,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초대받은 자의 감각이었다.
박민지씨의 주특기는 프렌치 요리다. 달걀찜도 생크림과 냉장고 속 채소를 활용해 이국적인 멋을 더한다. 프랑스 유학 시절 어려서 어머니를 돕던 기억을 되살려 친구들에게 밥을 해주며 요리에 눈을 떴다. 스타 셰프 조엘 로브숑의 요리 프로그램을 ‘밥 친구’ 삼고, 친구의 어머니와 이웃집 할머니의 솜씨를 배우기도 했다. 귀국 후 디자이너가 된 뒤에는 파리 출장이 잡힐 때마다 학생 시절에 눈여겨봐 둔 현지 레스토랑을 찾으며 미식 경험을 쌓았다.
박씨는 평소 그의 음식을 즐겨 먹던 지인들의 추천으로 2022년 요리 유튜브 채널 르쁠라(Leplat)를 개설했다. 독학으로 편집을 익혀 일주일에 한 편 정도 올리기 시작했는데, 벌써 400편에 가까운 기록이 쌓였다. “오늘도 맛있고 멋있게 보내세요”라는 채널 소개에는 패션 디자이너와 요리 크리에이터의 정체성이 고루 담겼다. 직접 찍은 사진과 레시피를 담은 책 <집으로 초대>도 발간했다.
“예술작품처럼 예쁘다”는 댓글이 달리지만, 만드는 법의 순서는 보통 5~6번, 아무리 복잡해도 10번을 넘지 않아 위화감이 적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담음새, 플레이팅이다. 그중에서도 동그릇은 그의 시그니처라 할 만하다. 부엌에 들어서면서부터 오후의 햇빛을 받아 은은한 구릿빛을 발산하는 그릇장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릇에 ‘잘생겼다’는 표현을 쓰고 싶을 정도로 우아하고 늠름하다.
박씨는 “어려서는 예쁘다고 생각만 하다가 직장인이 된 뒤 출장길에 사거나, 직구로 모은 것들”이라고 했다. 구리 컬렉션은 냄비나 팬부터 빵 바구니, 타르트 틀, 뒤집개, 화로 등 주방 기구 대부분을 망라한다.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아예 단골 가게도 있다. 가장 비싼 파스타 솥은 직구로 140만원에 샀는데, 한국에서는 200만원이 넘는단다. 나날이 오르는 구리 시세를 생각하면 짐작 가능한 가격이다.
솜씨 좋은 요리사의 집에서 그릇은 가격보다 쓰임새가 우선이다. 손바닥 크기의 양수 냄비는 오븐에도 넣을 수 있고, 그대로 1인용 그릇으로 식탁에 올려도 근사하다. 물고기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생선 찜기는 연한 살이 부서지지 않도록 들어 올릴 수 있는 채반도 갖췄다. 전 세계를 뒤져 스웨덴 옥션에서 구한 애장품이다. 동그릇 특유의 얼룩이 세월의 흔적처럼 남는데 그 또한 매력이다. 틈틈이 전용 세제를 이용해서 닦아 둔다. 유일한 단점인 육중함을 기꺼이 감수할 만하다.
그릇장만큼이나 궁금한 건 디자이너의 옷장이었다. 눈치 빠른 박씨가 먼저 드레스룸 문을 열어줬다. “디자이너 옷방치고는 시시하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게 언니와 함께 쓰는 옷방치고도 단출했다. 가방과 신발 상자 등을 넣어둔 수납장과 의류 매장에서 볼 법한 이동식 행거 네댓 개가 있었다. 시스템 옷장보다 더많이 들어가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디자인실’에서 얻은 노하우라고 했다.
경영이나 투자 분야에서 자주 쓰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개념은 그리 로맨틱한 용어가 아니다. 박씨의 집은 선택과 집중의 홈 버전으로, 공간에 평온함이 흐른다. 인터뷰를 위해 살림살이를 죄다 지하창고에 잠시 넣어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물론 평범한 구조의 아파트다!)로 그릇장이나 드레스룸 모두 딱 필요한 것으로만 정갈하게 채워져 있다.
디자이너 초년 시절에는 예쁜 옷을 만드는 것만이 제일 중요한 줄 알았다. 그러나 책임자의 자리에 올라 보니 마케팅부터 백화점 매장의 위치를 비롯해 고객 명단에 이르기까지 신경 써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옷보다 숫자가 먼저 그려질 때는 디자이너로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이토록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지만, 패션 업계는 수년 전 활황기처럼 몇 배수의 제품을 미리 생산해 쌓아놓고 팔던 공식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박씨는 소모적인 패션 산업의 현주소를 돌아보고 기존 방식과는 다른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본업에 무게를 실어 3년 전 <패션 디자이너, 미래가 찬란한 너에게>를 내놓은 데 이어 최근 <세계 유명 패션 디자이너 50인>을 출간하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그가 커리어의 선택과 집중의 기로를 지나 어떤 새로운 작품으로 또 다른 ‘플레이팅’을 완성할지 숨죽여 기다려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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