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담패설 飮啖稗說]메밀회 - 소바를 다 먹은 남녀는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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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5-06-14 12:57본문
냉면·막국수·소바…다양한 조리법만큼한국·일본 모두유래 깊은 음식
강원도 막국수는껍질을 ‘마구’ 갈아서,또는 이제 ‘막’ 뽑아서막국수가 됐다는 설
소바는 일본어 ‘메밀’에도시대 소바집은일종의 러브호텔주인 거주용 2층을커플에게 ‘대실’해줘
서울 광화문의 한 노포(老鋪). 늘 그 앞을 지나다가도 매년 이맘때면 한결같은 계절의 변화를 체감한다. 워낙에도 인기 많은 맛집이라 언제나 북적이지만 요즘은 헤집고 지나가야 할 정도로 인파가 몰린다. ‘아이고, 무더위가 시작됐구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시원한 메밀국수 때문이다.
메밀국수는 메밀로 만든 국수다. 무슨 말장난인가 싶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보자. ‘메밀로 만든 국수’라고 했을 때 저마다의 머릿속엔 제각각의 메밀국수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그 맛들. 슴슴한 육수와 함께 즐기는 평양냉면도 메밀국수이고 새콤달콤 비벼 먹거나 살얼음 뜬 육수에 말아 먹는 막국수도 메밀국수다. ‘판메밀’ 혹은 ‘냉메밀’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근한 일본식 메밀국수 ‘소바’도 빼놓을 수 없다. 그도 아니면 식당에 따라 그냥 ‘메밀국수’라는 이름으로 메뉴를 내놓는 곳들도 있다. 혹자는 물을 수도 있겠다. 왜 여기에 함흥냉면은 빠지냐고. 양념장과 회무침 등을 듬뿍 올려 비벼 먹는 함흥냉면의 면은 고구마나 감자 전분으로 만든 것이므로 메밀국수 범주에는 넣을 수 없다.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는 전통은 꽤 오래됐다. 조선시대엔 왕실이나 관청에서 연회음식 말미에 메밀국수를 제공했다. 지금처럼 밀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시 면을 만드는 주재료는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던 메밀이었다. 구황작물이던 메밀은 민초들에게도 친숙한 식재료였다. <고려사>에는 사찰에서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 역시 메밀로 만든 국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방의학에 따르면 메밀은 비·위장의 습기와 열을 내려주고 소화를 돕는 효능이 있다. 시원한 육수와 함께 먹는 메밀국수가 무더운 여름철에 적합한 이유다.
메밀은 찰기가 부족해 메밀로만 반죽해 국수를 만들면 뚝뚝 끊어진다. 이 때문에 메밀로 국수를 만들 때는 밀가루나 전분을 적당히 섞는다. 장안의 이름난 냉면집들은 메밀가루와 전분의 비중을 저마다 달리해 나름의 식감을 차별화했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에는 100% 메밀로만 반죽해 뽑아낸 면이 메밀의 맛과 향을 살려 고급스럽다는 인식도 있다.
같은 메밀을 사용하는 국수이긴 하나 막국수는 냉면에 비해 다소 ‘하대’를 받는 느낌이다. 메밀이 많이 나는 강원도 지역에서 주로 만날 수 있는 막국수는 투박하고 거친 이미지가 있다. 평양냉면처럼 원형에 얼마나 가까운지, 법도와 족보를 따지는 소위 ‘면스플레인’의 대상은 아니다. 아마도 ‘막’이라는 접두사가 주는 질박한 느낌 때문일까. 춘천, 평창 등 강원도 대부분 지역과 달리 양양에는 ‘메밀국수’ 상호를 단 국숫집들이 꽤 몰려 있다. 그렇다고 이곳의 메밀국수가 막국수와 다른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아는, 그런 막국수다. 아무튼 메밀로 만든 국수이니 메밀국수라 불렀을 법도 한데 어쩌다 막국수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막국수는 평양냉면에 비해 면의 색깔이 검은 편이다. 색깔이 검은 것은 메밀의 껍질을 같이 갈아넣어 반죽했기 때문이다. 껍질을 대충 벗기고 ‘마구’ 갈아서 만든 국수라서 막국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바로’ 혹은 ‘금방’ 만든 국수다. 탄성이 없는 메밀의 특성 때문에 반죽을 하자마자 곧바로 국수를 뽑아 만들어야 해서 막국수가 됐다는 이야기다.
금방 뽑았든, 마구 갈았든 메밀국수 대신 막국수라는 이름이 자리 잡은 이면엔 이처럼 서민적이고 친근한 사연이 있다. 최근에는 막국수도 냉면처럼 겉껍질을 벗겨 만들기도 하고 육수에 공을 들이는 경우도 많아 냉면과 차이가 없는 막국수를 내는 곳들도 꽤 늘었다.
많은 식당에서 ‘판메밀’ ‘냉메밀’ 등의 이름으로 판매하는 메밀국수는 물기가 빠지는 판 위에 삶은 메밀국수를 올리고 별도로 간장소스를 내서 찍어먹는 형태이다. 이는 일본식 소바, 그중에서도 소쿠리에 담긴 면을 쯔유에 찍어 차갑게 먹는 ‘자루소바’의 변형으로 보면 된다.
소바는 일본어로 메밀을 일컫는다.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요리를 총칭한다. 에도시대 때부터 대중적으로 먹어온 소바는 일본인에게 솔푸드로 여겨진다. 당시 에도(현재의 도쿄)는 극심한 남초도시였다. 에도막부가 지방의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해 실시한 참근교대제 때문이었다. 이는 다이묘의 가족들을 에도에 인질로 잡아둔 채 1년은 자신의 영지에서, 1년은 에도에서 살게 한 것이다. 다이묘 한 명을 따르는 수행원만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이었다.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이 참근교대를 위해 에도에 올 때마다 수행원 수십만명이 북적거렸을 터이다. 자연히 이들이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당시 거리에서 팔던 소바며 스시, 덴푸라 등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소바는 메밀에 들어 있는 비타민 B1 덕분에 각기병을 예방해주는 효과도 있어 건강식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소바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드러낸 이로는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등에서 소바에 대한 애정과 뚜렷한 취향을 말하고 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우동은 마부들이나 먹는 거지. 소바의 맛을 모르는 사람만큼 딱한 이도 없네.” “이 긴 가락을 국물에 3분의 1쯤 담가서 한입에 후루룩 삼키는 거지요. 씹으면 안 됩니다. 씹으면 소바의 맛이 사라지거든요.”
에도시대에 소바집은 일종의 러브호텔로 애용되기도 했다. 서로를 향한 열정이 끓어오르는 남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존재했을 터. 당대의 대도시였다지만 요즘과 달리 밀회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았을 그들에게 소바집은 좋은 선택지였다. 전직 외교관 신상목씨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에도 서민들이 거주하는 나가야(일본식 연립주택)는 좁고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에도의 아베크족들이 둘만의 공간이 필요할 때 이용하기 시작한 곳이 소바집이나 우동집 등의 대중음식점이었다. 소위 ‘소바집 2층’ 풍습이다. 본래 주인의 거주용으로 사용되던 2층 방을 데이트용 방으로 빌려주는 것이다. 남녀커플들은 1층 객석에서 요리와 술을 즐기고 자연스레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인용 대실 비즈니스인 셈이다.”
음식점이 러브호텔로 활용됐던 사례로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의 중국집, 즉 ‘청요리집’도 있다. 일본인 기자가 경성의 밑바닥 인생을 르포했던 책 <대지를 보라>에 따르면 당시 청요리집은 간통하는 남녀가 애용하거나 비밀리에 성매매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식당 안에 한두 개씩 있게 마련인 다다미방을 잡고 술과 음식을 시킨 뒤 종업원 ‘뽀이’한테 팁을 주면 만사 오케이였다. 왜 그랬을까.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싫어도 눈을 질끈 감고 해치우는 데다 비밀을 엄수하는 것이 중국인들의 천성이라 안전한 만남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일본인 기자의 생각이었다.
강원도 막국수는껍질을 ‘마구’ 갈아서,또는 이제 ‘막’ 뽑아서막국수가 됐다는 설
소바는 일본어 ‘메밀’에도시대 소바집은일종의 러브호텔주인 거주용 2층을커플에게 ‘대실’해줘
서울 광화문의 한 노포(老鋪). 늘 그 앞을 지나다가도 매년 이맘때면 한결같은 계절의 변화를 체감한다. 워낙에도 인기 많은 맛집이라 언제나 북적이지만 요즘은 헤집고 지나가야 할 정도로 인파가 몰린다. ‘아이고, 무더위가 시작됐구나.’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시원한 메밀국수 때문이다.
메밀국수는 메밀로 만든 국수다. 무슨 말장난인가 싶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보자. ‘메밀로 만든 국수’라고 했을 때 저마다의 머릿속엔 제각각의 메밀국수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그 맛들. 슴슴한 육수와 함께 즐기는 평양냉면도 메밀국수이고 새콤달콤 비벼 먹거나 살얼음 뜬 육수에 말아 먹는 막국수도 메밀국수다. ‘판메밀’ 혹은 ‘냉메밀’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근한 일본식 메밀국수 ‘소바’도 빼놓을 수 없다. 그도 아니면 식당에 따라 그냥 ‘메밀국수’라는 이름으로 메뉴를 내놓는 곳들도 있다. 혹자는 물을 수도 있겠다. 왜 여기에 함흥냉면은 빠지냐고. 양념장과 회무침 등을 듬뿍 올려 비벼 먹는 함흥냉면의 면은 고구마나 감자 전분으로 만든 것이므로 메밀국수 범주에는 넣을 수 없다.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는 전통은 꽤 오래됐다. 조선시대엔 왕실이나 관청에서 연회음식 말미에 메밀국수를 제공했다. 지금처럼 밀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시 면을 만드는 주재료는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던 메밀이었다. 구황작물이던 메밀은 민초들에게도 친숙한 식재료였다. <고려사>에는 사찰에서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 역시 메밀로 만든 국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방의학에 따르면 메밀은 비·위장의 습기와 열을 내려주고 소화를 돕는 효능이 있다. 시원한 육수와 함께 먹는 메밀국수가 무더운 여름철에 적합한 이유다.
메밀은 찰기가 부족해 메밀로만 반죽해 국수를 만들면 뚝뚝 끊어진다. 이 때문에 메밀로 국수를 만들 때는 밀가루나 전분을 적당히 섞는다. 장안의 이름난 냉면집들은 메밀가루와 전분의 비중을 저마다 달리해 나름의 식감을 차별화했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에는 100% 메밀로만 반죽해 뽑아낸 면이 메밀의 맛과 향을 살려 고급스럽다는 인식도 있다.
같은 메밀을 사용하는 국수이긴 하나 막국수는 냉면에 비해 다소 ‘하대’를 받는 느낌이다. 메밀이 많이 나는 강원도 지역에서 주로 만날 수 있는 막국수는 투박하고 거친 이미지가 있다. 평양냉면처럼 원형에 얼마나 가까운지, 법도와 족보를 따지는 소위 ‘면스플레인’의 대상은 아니다. 아마도 ‘막’이라는 접두사가 주는 질박한 느낌 때문일까. 춘천, 평창 등 강원도 대부분 지역과 달리 양양에는 ‘메밀국수’ 상호를 단 국숫집들이 꽤 몰려 있다. 그렇다고 이곳의 메밀국수가 막국수와 다른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아는, 그런 막국수다. 아무튼 메밀로 만든 국수이니 메밀국수라 불렀을 법도 한데 어쩌다 막국수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막국수는 평양냉면에 비해 면의 색깔이 검은 편이다. 색깔이 검은 것은 메밀의 껍질을 같이 갈아넣어 반죽했기 때문이다. 껍질을 대충 벗기고 ‘마구’ 갈아서 만든 국수라서 막국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바로’ 혹은 ‘금방’ 만든 국수다. 탄성이 없는 메밀의 특성 때문에 반죽을 하자마자 곧바로 국수를 뽑아 만들어야 해서 막국수가 됐다는 이야기다.
금방 뽑았든, 마구 갈았든 메밀국수 대신 막국수라는 이름이 자리 잡은 이면엔 이처럼 서민적이고 친근한 사연이 있다. 최근에는 막국수도 냉면처럼 겉껍질을 벗겨 만들기도 하고 육수에 공을 들이는 경우도 많아 냉면과 차이가 없는 막국수를 내는 곳들도 꽤 늘었다.
많은 식당에서 ‘판메밀’ ‘냉메밀’ 등의 이름으로 판매하는 메밀국수는 물기가 빠지는 판 위에 삶은 메밀국수를 올리고 별도로 간장소스를 내서 찍어먹는 형태이다. 이는 일본식 소바, 그중에서도 소쿠리에 담긴 면을 쯔유에 찍어 차갑게 먹는 ‘자루소바’의 변형으로 보면 된다.
소바는 일본어로 메밀을 일컫는다.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요리를 총칭한다. 에도시대 때부터 대중적으로 먹어온 소바는 일본인에게 솔푸드로 여겨진다. 당시 에도(현재의 도쿄)는 극심한 남초도시였다. 에도막부가 지방의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해 실시한 참근교대제 때문이었다. 이는 다이묘의 가족들을 에도에 인질로 잡아둔 채 1년은 자신의 영지에서, 1년은 에도에서 살게 한 것이다. 다이묘 한 명을 따르는 수행원만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이었다.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이 참근교대를 위해 에도에 올 때마다 수행원 수십만명이 북적거렸을 터이다. 자연히 이들이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당시 거리에서 팔던 소바며 스시, 덴푸라 등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소바는 메밀에 들어 있는 비타민 B1 덕분에 각기병을 예방해주는 효과도 있어 건강식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소바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드러낸 이로는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등에서 소바에 대한 애정과 뚜렷한 취향을 말하고 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우동은 마부들이나 먹는 거지. 소바의 맛을 모르는 사람만큼 딱한 이도 없네.” “이 긴 가락을 국물에 3분의 1쯤 담가서 한입에 후루룩 삼키는 거지요. 씹으면 안 됩니다. 씹으면 소바의 맛이 사라지거든요.”
에도시대에 소바집은 일종의 러브호텔로 애용되기도 했다. 서로를 향한 열정이 끓어오르는 남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존재했을 터. 당대의 대도시였다지만 요즘과 달리 밀회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았을 그들에게 소바집은 좋은 선택지였다. 전직 외교관 신상목씨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에도 서민들이 거주하는 나가야(일본식 연립주택)는 좁고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에도의 아베크족들이 둘만의 공간이 필요할 때 이용하기 시작한 곳이 소바집이나 우동집 등의 대중음식점이었다. 소위 ‘소바집 2층’ 풍습이다. 본래 주인의 거주용으로 사용되던 2층 방을 데이트용 방으로 빌려주는 것이다. 남녀커플들은 1층 객석에서 요리와 술을 즐기고 자연스레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인용 대실 비즈니스인 셈이다.”
음식점이 러브호텔로 활용됐던 사례로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의 중국집, 즉 ‘청요리집’도 있다. 일본인 기자가 경성의 밑바닥 인생을 르포했던 책 <대지를 보라>에 따르면 당시 청요리집은 간통하는 남녀가 애용하거나 비밀리에 성매매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식당 안에 한두 개씩 있게 마련인 다다미방을 잡고 술과 음식을 시킨 뒤 종업원 ‘뽀이’한테 팁을 주면 만사 오케이였다. 왜 그랬을까.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싫어도 눈을 질끈 감고 해치우는 데다 비밀을 엄수하는 것이 중국인들의 천성이라 안전한 만남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일본인 기자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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